일제의 낙랑유적은 조작과 왜곡의 산물
[새로쓰는 고조선역사] 낙랑군 재평양설 비판 (3)
김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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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재(在)평양설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다. 사대주의가 골수에 박힌 중세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다수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반 역사자료와 고조선의 유적유물 분포 상황을 놓고 보면 낙랑군은 평양이 아닌 오늘날 요동지역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설치됐다는 설이 확고한 정설처럼 고착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책동 때문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어용학자들은 낙랑군 재평양설의 물증을 찾았다고 떠벌였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물증이란 낙랑고분은 중국식(한식) 묘제라는 것이 첫째이며, 거기에서 나온 유물들이 중국(한식) 유물이라는 것이 둘째이다. 오늘은 그들이 제시한 물증을 분석함으로서 낙랑군 재평양설의 허구성을 까밝혀 보려 한다고 현장언론 민플러스가 보도했다.

1. 낙랑고분 발굴과정의 비정상성

일제의 낙랑고분 발굴과정은 정상적인 고고학적 발굴과정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의도 아래서 진행된 군사작전이었다. 그 군사작전의 목표는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평양의 낙랑고분에서 한나라의 낙랑군 유적유물을 발굴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군사작전을 쓰더라도 과학적 원칙성을 견결히 지킨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냐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2003년 5월 일본 고고학계에서 발생한 대규모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후지무라 신이치가 자신이 미리 만든 유물을 발굴 예정 장소에 몰래 묻고, 나중에 공식 발굴 작업을 통해서 찾아내는 방식을 통해 20여년 동안 4천여 점의 구석기 유적을 조작하다 들통 난 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학적 원칙성도 내팽개치는 것이 일본 고고학계의 역사적 풍토였다.

일본은 근대사학을 도입한 후 정한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 연구를 전략적으로 추진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열등성과 역사의 후진성을 합리화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임나일본부 지배설과 평양지역 낙랑군설을 두 축으로 해서 역사 왜곡작업을 서둘렀다. 1907년 일본 만주철도 주식회사가 일본 정부명령에 따라 ‘만주 역사지리 조사실’을 설치해, 시라도니 등 동경제대 교수들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 등을 간행해 우리역사의 타율성을 주창했다. 1909년 동경제대 교수 도리이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에 파견해 우리나라와 만주 일대를 샅샅이 훑고 〈남만주조사보고서〉를 냈다.

한편 조선통감부는 동경공대 교수 세끼노에게 조선의 고적조사를 의뢰하여 ‘고구려 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지역 고분 2기를 발굴했다. 이러한 사전 준비과정을 거쳐 강제적인 한일병탄 이후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끝낸 도리이의 제언에 따라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고 평양지역의 고분을 2차로 발굴해 벽돌로 쌓여진 현실 내에서 한나라 시대 양식의 구리거울,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는데 이것이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의 낙랑군 유물'로 조작하는 시초 작업이었다. 그리고 1911년 9월 점제현 치지 발견, 1911년 10월 대방태수 장무이묘 발굴, 1911년 10월 대방군 치지 발견, 1913년 9월 낙랑군 치지 발견, 1913년 9월 점제현 신사비 발견 등 낙랑군 재평양설을 체계화하기 위한 전광석화 같은 작전이 펼쳐졌다.

2. 유물 조작 사례들

점제현 신사비

낙랑군 재평양설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점제현 신사비이다. 낙랑군 점제현은 낙랑군 25현 중의 하나이며, 점제현 신사비는 이 현에서 풍년들기를 기원하며 호랑이 산신에게 제시지내던 산신당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의 높이는 1.35m, 너비 1.09m, 두께 0.12m나 되는 비교적 큰 화강석재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예서체로 쓴 79자의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내용으로 볼 때 기원 85년 후한의 영역 안에 세워졌던 비이다. 이 비가 원래 현재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비라면 그 지역이 낙랑군 점제현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이 과연 처음 세워졌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가? 어떤 의도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부터 옮겨졌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 점제현 신사비

점제현 신사비는 누군가에 의해 원래 있던 자리로부터 옮겨졌다. 그 근거는 첫째, 19세기 말에 편찬된 용강현읍지에 점제현 신사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 둘째 비석이 옮겨진 바 없는데도 비석 밑을 파보니 이조 시기 사기조각이 나왔다는 점(2000년 전에 세운 것이 아니라 근대에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셋째 북한 고고학 연구소 연대측정집단이 과학적으로 조사 분석한 바에 따르면 비석의 광물 화학조성과 생성연대로 봐 온천부근 화강석이 아니라 요동 해성지방의 화강석에 가깝다는 것이 확증됐다는 점(〈고조선 역사개관〉p230)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그 어느 때인가 누군가에 의해 비석이 의도적으로 이 곳에 옮겨졌다는 것을 말해주며, 일제가 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해 내기 위해 얼마나 파렴치한 사기 행각, 역사 위조행위를 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일본 고고학계에서 체질화돼 있는 유물 조작습성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봉니

봉니라는 것은 다른 곳에 보내는 물건을 넣은 나무함을 도중에 열어보지 못하도록 노끈 같은 것으로 가로와 세로로 묶고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군현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단 한 개도 발굴되지 않았던 이런 봉니가 해방 전 낙랑토성에서 200여개가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봉니들은 모두 가짜이며, 조작된 것들이다.

▲ 낙랑지역에서 발굴 되었다는 봉니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원래 봉니는 남을 수 없는 것이다. 물건을 받으면서 그 함을 여는 순간 대부분의 봉니들은 훼손되기 마련이어서 남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의 수도 낙양과 장안에서는 봉니가 출토된 것은 극히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낙랑토성에서 그렇게 많은 봉니가 나올 수가 없다. 해방 전 봉니를 직접 위조한 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에 따르면 일제 골동품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수많은 봉니를 위조해 팔았다고 한다(〈고조선 역사개관〉 p224). 그러다 보니 심지어 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한 일제의 어용사가인 이마니시조차도 낙랑토성에서 수집한 거의 모든 봉니가 가짜라고 인정했다.

둘째,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가 당시의 도장 크기와 맞지 않는다. 무제 원수 4년(기원전 119년)에는 관인의 크기를 5품(1.5cm)으로 규정했는데,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는 대부분 2~2.2cm이다(〈고조선 역사개관〉 p224). 그러니 위조품일 수밖에 없다.

셋째, 봉니에 찍힌 군현명이 오직 낙랑군에만 국한돼 있으며, 그것도 도위부계통의 봉니가 전혀 없다. 봉니란 원래 다른 곳에서 보내온 문건을 받아 본 곳에서 나오는 게 정상이다. 그러한 봉니들 가운데서 자기 군 산하의 현들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인접 군에서 온 것도 있어야 하며, 중앙에서 온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출토됐다고 하는 봉니들이 전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중앙으로부터 온 봉니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것들이 조작품이 아니라면, 이것은 낙랑군이 한나라의 군현이 아닌 한나라와 전혀 관계없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라는 증거로 밖에 될 수 없다.

넷째, 봉니에 찍힌 관직명이 당시의 관직제도와 다르다. 대표적으로 일제가 1935년 과학적 발굴을 통해 드러났다고 주장하는 ‘낙랑대윤장’이라는 도장이 찍힌 봉니를 들 수 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낙랑대윤장이란 도장이 찍힌 봉니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왕망의 난 이후 신나라로 나라 이름을 바꾼 후 바뀐 관직명이 찍혀 있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중대한 허점을 안고 있다. 당시 신나라는 관직명뿐 아니라 군현의 이름도 바꿨는데, 당시 ‘낙랑군’은 ‘낙선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바뀐 군현명과 관직명이 새겨진 도장을 내려 보냈다. 이때 내려 보낸 도장이 찍힌 봉니라면, 응당 ‘낙랑대윤장’이 아닌 ‘낙선대윤장’이란 도장이 찍혀 있어야 옳다. 왜냐하면 태수를 대윤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낙랑군의 이름도 낙선군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랑대윤장이라고 찍혀 있으니, 이것은 명백한 위조품이다. 그리고 사족을 달자면 봉니란 원래 받은 곳에서 나오는데, 만약 진짜로 낙랑토성에서 그러한 봉니가 나왔다면, 낙랑군은 낙랑토성 지역(평양)이 아닌 그 어떤 다른 곳에 있다는 말로 된다. 이러나저러나 그 봉니는 낙랑군 재평양설의 확실한 증거로 될 수 없다.

다섯째, 같은 도장명이 찍힌 봉니들의 도장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이것 또한 봉니가 위조품이라는 증거로 된다. 봉니가 진품이라면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가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례로 동이장인이라는 도장이 찍힌 봉니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한변의 길이가 2cm이고, 다른 하나는 2.1cm이다. 이것은 이 봉니들이 위조품이라는 증거로 된다. 그런데 이같은 봉니들이 많이 나타났다.

여섯째, 북한 고고학계의 검증결과에 따르면 봉니들이 조작된 가짜라는 것이 확인됐다고 한다. 일제 어옹사가들이 평남 온천군 성현리에 있는 어을동 토성을 ‘점제현’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점제현 신사비’와 함께 점제봉니를 들었다. 그들이 소개한 봉니들 가운데서 ‘점□장인’ ‘ □제□인’ ‘점□승인’의 도장이 찍힌 봉니들이 있다. 북한 고고학 연구소 연대 측정집단이 이 봉니들의 화학 성분을 분석한 결과, 그 봉니들이 성현리 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낙랑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들었다(〈고조선 역사개관 〉 p228)고 한다. 만약 위 봉니들이 진품이고 성현리 토성이 점제현의 소재지였다면, 그 봉니들은 응당 성현리 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들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봉니들이 낙랑토성 근처의 흙이라면 100% 위조품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왕광무덤과 왕우무덤에서 나온 도장

일제 강점기 발굴한 왕광무덤(구 정백리 127호 무덤)에서 나왔다는 ‘낙랑태수연 왕광지인’이라는 나무도장, 왕우무덤(구 석암리 205호 무덤)에서 나왔다는 ‘오관연 왕우인’이라는 나무도장은 모두 도장의 재질, 형식, 서체 규격 등에서 한대(漢代)의 도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한대의 도장은 옥, 금, 은, 청동으로 만들게 돼 있는데, 나무도장이므로 한대의 도장규례와 맞지 않으며, 도장형식에서 관인에서는 관직명만 새기게 돼 있는데 관직명과 함께 사람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한대의 도장 형식과 맞지 않으며, 글씨체가 한대의 도장규례에 따르면 전자체인데 예서체로 돼있으니 잘못돼 있으며, 도장크기가 한대의 도장 크기인 1.5cm가 아닌 2.3cm이니 틀렸다. 이처럼 한대의 도장규례와 전혀 맞지 않아 모조품이거나 위조품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근 2000년 동안 무덤 안에 묻혀 있었지만 보존상태가 지나치게 좋고 글자 획 하나 상한 게 없었다고 하니 위조품임이 명백하다.

3. 낙랑 유적유물에 대한 왜곡된 해석

효문묘 동종

1920년 동평양에서 철도 부설공사 때 귀틀무덤에서 출토됐다고 일제 어용사가들이 주장한 것인데, 그 동종에는 “효문제 사당(종묘)에 쓸 청동단지인데 10되들이이고 무게는 47근이다. 영광 3년(기원전 41년) 6월에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이것을 놓고, 평양일대에 효문묘가 있었다는 확실한 물증으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효문묘(효문제를 제사지내는 사당)는 한나라 문제(기원전 179~157년)와 직접 관계가 있는 고장에만 설치한 것으로 한나라 문제 생존시에 고조선 땅이었던 평양지방은 효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이므로 효문묘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후세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물건일 뿐이다. 그 단적인 예가 효문묘 동종이 나왔다는 귀틀무덤이다. 이 무덤은 효문묘 동종이 만들어졌다는 기원전 41년보다 100년 후인 기원후 1세기 중엽경에 만들어졌다. 사당이 아닌 무덤에서, 그것도 만들어진 지 100년이 지난 무덤에서 발굴된 효문묘 동종을 갖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채엽무덤에서 나온 나무패쪽

채엽무덤은 낙랑토성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서 알려진 귀틀무덤으로 기원 2세기 초에 축조된 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유명한 채엽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문제로 되는 것은 글자가 쓰여 있는 나무패쪽이다. 이 나무패쪽에는 “견질물 세필 옛 속료 조선승 전굉이 삼가 아전을 보내 두 번 절하고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무덤 발굴보고서 작성자는 무덤 주인공의 옛 속료이며 낙랑군 조선현의 승인 전굉이 자기 부하를 보내 견직물 세필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으니 무덤 주인공은 조선 현령쯤 되는 사람이라고 추측하면서, 이것 역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 나무패쪽의 글은 한나라 시대의 장례풍습과 맞지 않는다. 한나라 시대 장례풍습에서는 물건의 수량과 보낸 사람의 이름만 쓰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됐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풍습이 지배했던 낙랑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조선현의 승인 전굉이 자기의 옛 상관의 장례에 직접 가지 않고 자기 부하를 보내 견직물 세필을 바치고 제사했다고 한 것이다. 만약에 평양일대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만일 조선현 승이 나무패쪽대로 자기 부하를 보내 물건을 바치고 제사를 지낸 게 사실이라면 이 조선현은 평양인근이 아니라 평양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 나무패쪽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평양일대가 한나라의 낙랑군이 없었다는 증거로 될 뿐이다.

대방태수 장무이묘

1911년 10월 일본 식민지 어용학자들에 의해 사리원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이 발견됐다. 일제 어용사학자들은 이 무덤이 288년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이 지역이 한나라의 대방군 지역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된다고 주장했다.

▲ 대방태수 장무이 묘

장무이 무덤은 무신년에 축조된 벽돌무덤이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314년에 대방군이 요서로 쫓겨 갔으니 이 무신년은 288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무덤은 4세기경 고구려 양식의 무덤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 무덤은 288년이 아닌 348년에 조성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장무이는 4세기초 고구려에 의한 대방군 함락 당시 또는 342년 고구려- 전연 전쟁 당시 투항해 온 자로 봐야 한다.

지금까지 낙랑 유적유물들의 조작과 왜곡사례들을 살펴봤다. 일제는 낙랑군 재평양설을 반드시 정립한다는 정책적 목표 아래 군사작전식으로 낙랑유적 발굴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학문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유적유물 위조 조작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파렴치한 짓거리를 자행했다. 이러한 풍토가 지배했기에, 최근년도에 무려 20여년에 걸쳐 4000여점에 달하는 구석기 유적을 조작하는 범죄행위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 많은 구석기 조작 유물들을 아무런 과학적 검증절차 없이 진품으로 인정하고 역사에 기록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일본 고고학계 자체가 과거 군국주의 시절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 조작과 왜곡을 일삼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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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02 [20:00]  최종편집: ⓒ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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