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과 강제철거 - 목동에서 용산까지
도시빈민의 삶과 투쟁(11) : 계속되는 강제철거로 인한 비극
김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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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0년대 이후 재개발과 강제철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정책 변화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에 대한 글이다.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고 현장언론 민플러스가 보도했다.

▲ 사진제공 : 빈민해방실천연대

1980년대 군부독재와 합동 재개발 사업

전두환 정권은 1982년부터 합동 재개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이전에는 철거부터 아파트 건설과 분양, 판매까지 전 과정을 장악해 이윤을 남기는 공영개발방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방식에 대한 저항이 발생해 종종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합동 재개발 정책은 가옥주가 재개발조합을 구성하여 건설회사와 함께 개발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건축비와 소유주 지분을 비교해서 그 차액을 지급해야 소유주의 입주가 가능하게 되어 이 방식은 본격적으로 건설회사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임대아파트의 비중을 낮추고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1983년에는 서울시가 직접 개입하여 추진했던 <신시가지 건설 사업추진 계획>에 맞서 저항한 ‘목동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 목동의 전체 철거대상은 2,359동 가운데, 허가건물 580동과 무허가 1,779동이었으며 세입자는 2,846가구와 가옥주 2,359가구를 합해 모두 5,205가구에 이르렀다. 철거를 강요받는 세입자만 1만여 명에 육박했다. 서울시는 주민들의 토지를 평당 7만 원에서 14만 원에 매입하고, 채권입찰제를 채택하여 호화 고층아파트 건설을 계획했으며 분양가를 평당 105만 원에서 134만 원으로 책정하여 개발이익을 남기려 하였다.

목동은 이주단지로 조성되면서 가옥주들에게는 연고권을 인정하여 부분적으로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세입자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목동 투쟁은 1984년 8월27일 양화대교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1백여 회가 넘는 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아파트입주권 부여와 임대아파트 보장 등을 관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주택과 도시문제에 대한 종교계와 학계의 관심을 끌어냈으며 학생운동 같은 다른 사회운동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하거나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작구 사당동은 1960년대 중구 양동과 용산구 이촌동 철거민들이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이었다. 사당동 철거민들은 1985년 1,052세대를 대상으로 결성된 세입자대책위를 중심으로 무려 2년6개월 동안 재개발법 철폐와 생존권 보장 등의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긴 싸움을 이어나갔다. 사당동 투쟁은 철거에 대응한 경찰서, 국회, 민정당사 농성, 구청 항의방문, 거리시위 등 공세적이고 지속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전에는 세입자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조합측에서 주는 소액의 이주비를 받는 것이 전부였지만 사당동 투쟁 이후 세입자 특별 분양권 보장과 특별 분양권에 대한 340여 만 원에 상당하는 전매보상책을 받는 등의 성과를 남겼다.

1985년 4월 재개발사업 지구로 지정된 상계동은 약 520세대의 세입자들로 구성된 세입자 대책위가 만들어졌다. 이때 철거민 운동에는 상계동뿐만 아니라 곳곳에 학생운동가들의 현장 진출이 두드러졌고, ‘도시빈민 생활권 보장과 구속자 석방, 살인철거 즉각 중단’ 등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군부독재 타도’가 대두되는 등 정치적 성격이 일반화되었다. 1987년 4.13 호헌조치 이후, 4월14일 강제철거가 감행되자 상계동 주민들은 명동성당으로 거점을 옮긴 후 종교단체의 지원을 이끌어내면서 농성을 진행했고 이어진 87년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 주목을 이끌었던 상계동 투쟁은 남양주시에 건설된 나래마을과 부천시 고강동 등의 이주단지에 공동체 마을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투쟁은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조합측으로부터 약 1년 간 투쟁에 대한 생계비를 보상받기도 하여, 5인 가족의 2개월 생계비에 상당하는 85만2,700원에서 약 100만 원 정도의 보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반적인 과정을 담은 한국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대표작인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1988년 5월, 성북구 돈암동에도 세입자대책위가 결성된다. 이 시기에는 이미 ‘서울시 철거민협의회(이하 서철협)’가 결성되어 조직적으로 강제철거에 대응하던 때였다. 돈암동 세입자 대책위는 6월 약 1,300여 명이 모여 <도시빈민 생존권 및 주민 주택 쟁취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평화적인 행진을 하던 중 삼선교에서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이게 되었고, 1989년 1월에는 600여 명이 참여하여 <도시빈민 생존권 운동 탄압 폭로 규탄 및 분쇄 결의대회>를 진행하였다.

돈암동 철거민 투쟁이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한겨울이었던 1989년 2월, 전경과 백골단 1,000여 명이 들이닥쳤고 같은 해 10월 철거용역반이 칼과 망치, 그리고 손도끼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경찰과 철거용역반의 만행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서철협은 곧바로 <돈암동 살인 테러 규탄 집회>를 서울역에서 개최하고 성북경찰서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인 끝에 철거용역반 전원과 폭력을 사주한 재개발 조합장을 구속시켰다(「삶의 소리 호외」 1989.10.16,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 소식지). 결국 1990년 3월26일 돈암동 철대위는 성북구민회관에서 진행된 구청장 간담회를 통해 “세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영구임대주택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4월10일 재개발 조합장과 영구임대주택 건립에 대한 공증서 작성을 하게 된다.

▲ 사진제공 : 빈민해방실천연대

1990년대 문민정부와 강제철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택보급률은 69%(1993년)로 증가했지만 주택보유률은 오히려 1985년의 53.6%에 비해 49.5%로 하락했다. 정책적으로 철거지역의 순환식 개발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세입자에게 임대주택 등이 보장되었지만 여전히 제한적이고 그 한계는 컸다.

1994년 8월 서울 관악구 봉천6동에서는 서철협 소속 배이순(여, 당시 37세)씨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일 저녁 7시쯤 배씨는 봉천6동 재개발지역 세입자들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현저동 주민 10여 명과 함께 찾아가 항의하던 중 철거용역반으로 추정되는 30대 남자가 휘두르는 흉기에 상해를 입게 되었다(「조선일보」 1994.8.10, ‘철거에 항의하려다 흉기에 찔려’).

1995년 4월25일 새벽에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6~7동 1재개발지구의 상가건물을 철거하던 J개발 철거용역반원 10명이 철거민대표 전모(여, 당시 40세)씨 등 4명에게 달려들어 바지를 벗기고 속옷 안에 연탄재를 집어넣는 등의 폭행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철거민들은 이 같은 사실을 바로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현장에 뒤늦게 출동해서 폭행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95.4.26, 철거용역반원 항의 여인에 “만행”). 이런 사건들은 철거지역에서 발생하는 인권유린에 대한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도시빈민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박순덕(여, 당시 34세)씨는 1995년 2월경 ‘대책 없는 강제철거 반대와 가수용 입주’를 요구하며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3동 철대위에 가입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글이다.

1997년 7월25일 오후 6시경, 굴착기 3대가 주민들이 있는 철탑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철거를 저지하기 위해 철거민 5~6명이 굴착기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철거용역반들이 철탑에 있는 주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포했다. 잠시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철탑 입구의 2중 문 중 바깥쪽 문이 부서졌다. 철거용역반들이 주민들이 바리케이드용으로 모아둔 폐타이어에 시너를 부어 불을 질렀다. 철탑은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당시 철탑 안에는 단전에 대비해 발전기를 가동하려고 준비해둔 휘발유가 있었는데, 이러한 인화 물질 등으로 인해 철탑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윽고 더 불길을 피할 수 없게 된 주민들은 5층 철탑에서 뛰어내렸고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인권하루소식」 1997.8.14, 946호).

이 사건으로 18m 높이에서 뛰어내린 박순덕 씨는 경희의료원으로 옮겨진 후 뇌사상태에 빠졌고 7월26일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추모하며 전국철거민연합은 매년 전농동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사진제공 : 빈민해방실천연대

2000년대 신개발주의와 강제철거

김대중 정권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고 주택공사를 임대주택 건립의 전담기구로 전환하는 등을 골자로 한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토지 주택정책’을 펼 것을 대선공약으로 발표하였다. 구체적으로 매년 50만 호씩 총 250만 호의 주택건설을 계획했으며, 주택 보급률 110% 달성과 1가구 1주택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출범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치며 ‘건설 자본가들을 위한 개발정책’으로 급선회하였다. 주택건설 민영화와 주택분양가 자율화는 건설 자본에게 무한이윤을 보장하였고, 그에 비해 개발지역 내 임대주택 의무비율제 폐지는 서민들의 내집마련의 기회를 무산시켰다. 김대중 정권의 이러한 무계획과 무대책의 개발정책은 또다시 철거민의 급증을 가져왔다.

노무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고 양도소득세를 강화했지만, 의도했던 투기억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며 치솟는 집값도 되돌리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주택·부동산 정책의 의지는 역대 정부보다 컸지만 수구보수세력은 ‘세금폭탄’을 운운하며 조세저항운동을 벌였다. 한나라당은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원점으로 돌리려 했고 연이은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의 참패와 지지율 하락으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게다가 서울시를 중심으로 ‘뉴타운’으로 표현되는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뉴타운 사업은 <도시개발법>에 의한 것으로 소규모 개발 사업을 광역 단위(생활권 단위)로 추진하면서 공공부문을 통해 기존의 다양한 도시개발 방식을 활용한다는 정책이다.

하지만 현실은 건설경기를 살리고 개발의욕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분양가 공개 없이 사업이 추진되었고, 건설 관련법을 바꿔 4대문 안에 용적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개발의 당사자이자 수혜자여야 할 원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의 입주율은 턱없이 미달하고 사실상 배제되었다. 더욱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뉴타운 사업은 분양가의 불법적인 책정, 개발이익 독점 등으로 주택공사를 비롯한 공기업과 건설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진행되었다.

한편, 상도동 건물 옥상에서는 2002년 4월부터 철거민들이 망루를 설치하고 ‘가이주단지와 영구임대주택’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2003년 11월28일에는 고공 크레인과 굴착기 등의 대형 중장비를 동원하고 가스총과 식칼로 무장한 철거용역반 수백 명과 경찰병력이 들이닥쳤다. 20여 명 남짓한 주민들을 상대하기 위해 3.5톤 고공 크레인에 철거용역반 행동대장들을 태운 컨테이너를 매달아 철거민들의 고공 농성장으로 침투하려고 했는데, 결국 무게를 못 이긴 크레인이 땅으로 추락했다. 영화를 방불케 하는 당시 상황은 당일 모든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

건설사와 경찰 측에서는 철거민들이 사제 총을 발사했다고 주장하며 호도하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도 총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사되었다며 도심테러집단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그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 결과 화약은커녕 사제 총에 대한 그 어떤 물적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추정과 추측만이 언론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고 국민들에게 철거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매도한 사건이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 철거용역반을 동원하여 강제철거를 시도했고, 이에 맞서 철거민들은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고 사제 총 사건은 2007년 대법원을 통해서 결국 8명 모두 무죄로 확정되었다(「YTN」 2006.7.3, '상도동 철거민 사제총 사용, 무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의 소망빌라에서는 2003년 3월부터 철거민 25여 명이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미 수차례 강제철거가 진행되다가 2004년 4월23일 철거용역반이 철거민을 상대로 새총으로 쇠구슬을 쏘고 화염병을 투척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차 3대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철거용역반 100여 명이 철판과 철망으로 중무장한 대형굴착기를 앞세우고 강제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5월8일, 철거용역반은 단전을 하고 화염병을 투척하고 새총으로 쇠구슬을 조준 사격하며 굴착기에 H빔을 매달아서 마구 휘두르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16시간 동안 자행했다. 철거민들은 용역깡패의 화염병 반입과 투척을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하지만 철거현장에 지원 나왔던 한 활동가가 화염병과 새총을 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포착하여 언론에 제보하면서 철거 용역반의 폭력적인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오마이 뉴스」 2004.5.10, 일산 풍동 철거지역은 지금 '전쟁 중' ).

2009년 1월20일은 철거민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용산참사가 벌어진 날이다. 용산의 철거민들은 1월19일 남일당 건물 5층 건물에 올라가 생존권과 주거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면서 저항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불과 하루 만에 살인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하여 철거민 30여 명을 연행하기 위해서 1,200여 명의 경찰과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경찰은 크레인과 컨테이너를 이용하여 철거용역반과 합동으로 특공대원을 투입했고, 물대포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무차별적인 진압을 감행했다.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인 용산의 남일당 옥상 안에 갇혀 있던 철거민들이 건물 밖으로 떨어지는 등 경찰관 1명과 철거민 5명이 참사를 당했다. 철거민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화재로 5명을 죽음으로 내몬 경찰의 강제진압에 대해서는 적법한 공무집행이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검찰은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의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왜곡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검찰은 초기부터 사건기록의 약 3천 쪽을 공개하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하는 등 위헌적이고 위법하고 편향적으로 정치재판을 진행했다. 결국 용산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모두 징역 4~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책 없는 개발 사업과 국가폭력, 그리고 주거 세입자들의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주거 이전비 등의 대책, 생계 터전을 잃은 상가 세입자에 대한 영업이익 보상 등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무엇보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사망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한다.

▲ 사진제공 : 노순탁 작가

다른 내일을 위한 민중의 단결과 연대

지금까지 1983년 목동투쟁부터 2009년 용산참사까지 철거민의 저항 중에서 큰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봤다. 철거민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도당하고 배제되었는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봤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서울과 대도시 곳곳에는 재개발을 알리는 현수막이 올라가고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남아서 싸워야 하는 사람으로 나뉘고 있다. 그로 인해 오늘의 노동을 끝내고 편히 쉴 수 있는 집과 공간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개발에 지쳐 이리저리 떠밀려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도시 빈민들은 대도시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다.

사람이 아닌 이윤을 쫓는 개발의 악순환을 끊어낼 때만이 모든 이들이 주거와 삶에 보금자리에서 두발 뻗고 편히 쉴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철거민이 될 수 있는 도시의 평범한 사람들은 개발사업의 본질을 금방 파악하기 어렵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순수성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욕망의 재생산으로 개발과 성장이 최고라는 하나의 의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평범한 사람들도 끝없이 욕망하는 개발사업의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개발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자본의 탐욕을 제어해야 하고 그 자본의 탐욕을 용인하고 부추기는 정치권력을 제어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항하는 도시빈민과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이 함께 연대하여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통제할 때만이 민중의 더 나은 삶이 가능해 진다. 민중의 단결과 연대만이 다른 내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사진제공 : 빈민해방실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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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2 [14:38]  최종편집: ⓒ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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