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하늘이 내린 어질고 바른 왕 '정조대왕'
[화성 따라잡기2-염상균] 정조는 어떤 사람인가?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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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어떤 사람인가


- 탄생과 어린 시절
 
정조正祖 임금은 영조 17년(1752) 9월 22일 축시(01~03)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그에 앞서 영조 16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용꿈을 꾼 사도세자는 징조가 예사롭지 않다며 새하얀 비단에다 꿈에 본 용을 그려 벽에 걸었다. 성자를 낳을 조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아버지의 예감에 대답했다. 큰 쇠북소리를 울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온 궁중이 다 놀랐던 것이다. 비록 강보에 쌓여 있지만 기상이 의젓하고 콧날이 우뚝했으며 꿈에서 용을 보아서인지 얼굴은 용을 닮아 있었다. 영조 임금도 경사를 맞아 산모인 혜경궁에게,

“네가 이런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사직에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고 하면서 아기의 이마와 뒤통수가 자신을 닮았다고 흡족해 했다.

온 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기는 백일도 되기 전에 섰고, 일 년도 채 못되어 걷기 시작했으며 돌 때는 돌상으로 걸어가서 맨 먼저 붓과 먹을 만지고 책을 펴서 읽는 시늉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백일이 되기 전에도 글자 같은 것을 보면 좋아하는 기색이어서 사도세자는 직접 첩책(帖冊)을 써서 아기에게 준다. 그러면 아기는 늘 아버지가 만들어준 책을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결국 종이가 다 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글씨 쓰기를 좋아해 두 살 때 이미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너덧 살 때는 제법 필획(筆劃)이 이루어져 날마다 그것으로 장난을 삼았다. 그리고 대여섯 살 때 쓴 글씨를 가지고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글은 이미 너댓살 때 다 알아서 어른처럼 편지를 써 내려갔다.

타고난 천성이 검박하여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입은 옷이 더러워지고 해져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노리개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붙이지도 않았다. 장난감도 질박한 것을 좋아하여 한 번 마음에 들면 오래 가지고 놀았다. 늘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는 독서를 시작했는데 일상이 그러했다.
또, 너댓살부터 꿇어앉기를 좋아해 언제나 바지 무릎 닿은 곳이 먼저 떨어지곤 하였다.
여다홉살이 되자 더욱 더 장중하고 별로 말이 없었으며 조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여 얼굴빛이 변하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죽이나 반듯했으면 영조가,

“세손의 성품이 보통과는 아주 달라 털끝만큼도 이탈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禁苑(금원)에 꽃이 필 때도 나를 따라서가 아니고서는 한 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고 날마다 독서가 일인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라고 칭찬을 하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다음해인 영조 39년(1763) 2월 18일 할아버지 영조와 손자의 대화는 열 두 살 어린이의 대답이라고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영조: 공자가 어찌하여 자주 물에 대하여 일컬었는가?
세손: 그것이 밤낮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영조: 내나 도랑을 혹 사람의 힘을 써서 틔우기도 하고 파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손: 그 더러운 것들이 막기 때문입니다.
영조: 네가 능히 몸에 공부하기를, 마침 내를 틔우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
세손: 마땅히 거울을 닦는 것처럼 마음을 씻겠습니다.
영조: 거울의 본질이 어두워 닦는다는 것이냐?
세손: 본질이 어찌 처음부터 어두웠겠습니까? 먼지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닦으면 밝아질 것이니 明德(명덕)을 밝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영조의 표정이 흐믓한 미소로 가득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조는 타고난 천품도 반듯했거니와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교육을 통해서도 함양되었다. 관례대로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교육을 담당했는데, 첫 시간 공부는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외워 보이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호된 질책이 뒤따르는 법인데, 영특한 정조는 일부러 한 두 글자를 틀리게 암송하고 이를 지적하지 못하면 거꾸로 교수관들을 나무랐다고 한다.


- 정조의 성격

정조는 자신의 성품이 잘 참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아첨하거나 굴종하는 모습을 보면 반드시 통박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원망을 많이 샀고, 즉위 초에는 이런 성격에 대해 혹독한 비방을 받았다. 이를 이겨낸다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자제하기 어려운 것이 성냄怒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 때문에 매우 화가 날 때에는 그 일을 제쳐두고 성깔을 가라앉힌 다음 처리하였다. 이렇게 불같은 성질을 누그러뜨리니 큰 잘못은 면하게 되더라고 경험을 토로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 한 가지 반찬에 젓가락이 가면 종종 그밖에 다른 반찬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백성과 국가에 관한 일에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으니 자신이 쓰는 생활 도구에도 관심이 없었고,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바둑이나 잡기에 눈 돌릴 여가가 없었다. 오로지 정사를 보는 틈틈이 책상 위의 책을 펼쳐보는 것만이 즐거울 뿐이라고 했으니, 독서가 취미라는 말이다.
그는,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데는 자신을 살펴 볼 일이지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의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세상에 정해진 이치는 있지만 정해진 일은 없기 때문에 남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마침내 줏대 없는 사람이 된다.” 고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그는 근엄하면서도 공순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하늘을 깎듯이 섬겼다. 해가 비치는 곳이면 항상 자세를 바로 잡았고, 옷을 갈아입거나 소변을 볼 때에도 북극성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을 향하지 않았으며, 비바람이 치거나 천둥이 일면 반드시 일어나 표정을 고쳤다. 종묘에 제사하고 문밖을 나설 때는 근엄하고 경건한 태도였고 술잔을 올릴 때면 민첩하기가 날아갈 듯하여 일을 돕는 백관들도 모두 엄숙히 대했다. 능(陵)이나 園(원)의 제사에도 과일이나 떡 같은 제사 음식을 올려오면 반드시 꿇어앉아 맛을 보았다.

御座(어좌) 곁에는 도서와 기물들이 일정한 곳에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었고, 방안 구석구석도 선을 그은 듯이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서 혼자 있는 곳에서도 처신이 어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빈틈없이 숨막힐 것 같은 긴장 속에서도 한가할 때 신하들을 접견하면 까다로운 예절을 대개 생략하고 간소하게 맞이할 줄 알았다. 늘 웃는 얼굴로 대하여 한집안 부자 사이같이 따스함이 오갔다. 그러다가 법전에 나오면 그 엄숙한 표정에 뭇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는 되도록 먼 장래를 생각하면서 그릇도 조각한 것을 쓰지 않고 옷은 새 옷보다 세탁한 것을 즐겨 입었으며 무명베 요에 부들자리도 아주 편안하게 여겼다. 머물던 집도 겨우 몇 칸의 작은집이었는데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창문이나 벽에는 매연이 시꺼멓게 붙었다.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집수리를 하자고 하면,
“그것은 무슨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누추하지 않아서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또 사옹원(司饔院)이 사기그릇을 정교하고 화사하게 굽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대하여는 부지런하고 집이나 자신에 있어서는 검소했다.

왕이 이러니 왕후 또한 마찬가지여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운가 하면 공순하고 검소하였다.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좀체 기쁜 마음이나 성난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는데 그러면 그들이 더 부끄러워하고 황공해 할 뿐이었다. 옷이나 그릇들도 겨우 쓸 수 있을 정도로 만족해했지 욕심을 부리거나 좋은 것을 찾지는 않았다.

정조는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군주였다. 사도세자 묘원인 현륭원에 송충이가 극성을 부리자 수원의 백성들에게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하여 돈을 주고 사들였다. 그러면서 그 처리 방법에 있어서,
“이 벌레들이 누에나 벌 같은 공로도 없고, 모기나 등에의 해독보다 심하기는 해도 곧 또한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이니, 몰아 쫓아버리는 것이 불에 태워버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듣기로는 벌레가 바다로 날아 들어가 어하(魚鰕)-물
고기와 새우-가 됐다고 하는데 그를 잡아 바다에 던져 버려라.” 고 하였다.
 
또 언젠가 여러 신하들과 부용정(芙蓉亭)에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자리가 다 마련되고 거문고 등도 다 차려 놓았을 때 그 들보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가 새끼에게 무엇을 먹이려고 빙빙 돌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는 그를 가엾게 여겨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으며 그 뒤로는 그 정자에 나올 때마다 제비 둥지에 대해 물었다. 이는 새나 벌레 같은 미물들까지도 다 왕의 지극한 은택 속에서 살고 있었던 한 단면이면서 왕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 예라 할 것이다.


- 정조의 효성

조선시대의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다. 지극한 효성을 갖추고 인정받게 되면 벼슬자리에 추천될 수도 있고 서원에 입학할 수 있는 특전도 있었다. 이는 예치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의 통치 방법에 효성을 십분 활용했다는 증거이다. 국왕들도 앞장서서 효성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정조의 효성은 다른 국왕들과 구별되는 점이 많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 그 슬픔을 어린 나이에 목도한 자신과,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친정을 둔 어머니, 그 심정들을 헤아려 애틋한 효성이 싹트게 되었다. 이중 아버지에 대한 효성은 각별하고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은 창경궁 앞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에 있었다. 이 사당에 정조는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찾아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작은 가마를 타고 적은 수의 수행원들만을 대동한 간소한 행렬이었다. 게다가 매년 아버지가 뒤주에 갇혔던 5월 13일부터 21일까지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에는 아예 경모궁에 살다시피 했다. 뒤주에 갇혔던 아버지의 심정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즉위한 지 13년이 지난 1789년 10월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개봉했을 때였다. 전부터 불길하다는 자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도세자의 관곽엔 물이 들어 있었으며, 관의 표면은 마치 얼음이 얼어 있는 것같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옛 광중에 그렇게까지 갖가지 재해가 있었는데도 차마 28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현궁을 거기에다 모셔 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라도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 주변에 갖출 것은 다 갖추어서라도 그것으로나마 작은 정성을 표해야겠다.”
고 한 다음,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절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인의 교훈일진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최대한 다하여 되도록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다.” 고 검약을 생활화했던 자신의 의지를 뒤집었다.
 
이래서 사도세자의 새묘원 현륭원의 석물 등 치장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되었다.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정조의 효성은 계속된다.
“나라에 일이 있으면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내 일찍이 자전께 여쭙지 않고 그냥 한 일은 없다.” 고 할 정도로 어머니를 받들었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부스럼이 났을 때는 밤낮으로 속을 태우며 친히 약을 볶아 바르곤 했기 때문에 손이 다 부르텄지만 그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수원에서 열어드린 회갑잔치에서도 크게 드러나지만, 그 잔치를 위해 수원으로 오는 도중에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머니가 드실 음식을 일일이 맛 본 다음에 올리게 하였고, 쉴 때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하루는 비가 내렸는데, 험한 고개나 미끄러운 길이 나오기만 하면 번번이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간 다음 불편하지는 않는지 물었다. 자신의 옷이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뿐 아니라 화성에서 야간 군사훈련 때는 어머니가 놀랄까 걱정되어, 대포의 방향을 어머니가 주무시는 행궁에서 되도록 멀리 향하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을묘년(1795) 윤 2월 13일, 어머니 회갑잔치 행사장에서 정조는,
“오늘의 예식은 진실로 천 년에 처음 있는 경사이며, 오는 갑자년(1804)에는 어마마마의 칠순이 되니 그때는 어마마마를 모시고 현륭원에 참배하고 또 마땅히 이 집 봉수당에서 오늘의 의식처럼 식사를 올리겠노라. 그러니 오늘 사용한 소반, 탁자, 술잔들의 물건을 본부에 그대로 보관하여 10년이 거듭 돌아옴을 기다리게 하라.” 고 하였으나 경신년(1800)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정조의 효성은 아버지 어머니를 뛰어넘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로 이어진다. 영조는 나이가 점점 높아질수록 여러 질환에 시달렸는데 10여 년 간을 밤낮 없이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병간호를 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증세가 조금이라도 더 심해지면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다. 앉고 눕고 하는 모든 기거를 몸소 보살피다보니, 영조는 손자가 너무 고달플 것이라고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대신하게 한다. 그러나 금방 짜증을 내면서,
“내 손자가 하는 것 같이 내 몸이 편하지가 않다.”
고 번복한다.
 
정조는 직접 할아버지의 소변 맛을 보기도 하며 애간장을 태우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에도 한결같이 지성을 기울였다. 이때의 경험이 정조로 하여금 의약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내의원 못지않은 의약 상식을 갖추게 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내가 무엇을 들라고 권하면 그것이 비록 구미에 맞지 않아도 평소 즐기는 것처럼 즐겨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 효성이 해가 갈수록 더해갔다.”
“내가 한 일이 혹 지나칠 때가 있어도 조금도 안 좋아하는 빛을 얼굴에 보이거나 말로 나타내는 일 없이 차분한 기색과 따뜻한 말씨로 마치 몸둘바를 모르듯이 했다.”
고 정조의 효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조는 그의 효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어버이를 미워하지 않으며,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은 감히 남의 어버이를 업신여기지 않는 법이다.”
정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어머니 집안과 아버지의 갈등 등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담배를 무척 좋아하였다.

담배의 별칭인 ‘남령초’에 대한 예찬-홍재전서 권6-은 이렇다.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기호품은 없었으나 오직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연구하고 탐닉하느라 마음과 몸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에 책속에서 생긴 병이 마침내 가슴속에 항시 막혀 있어서 혹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즉위한 이래로는 책을 읽던 버릇이 일체 정무로까지 옮겨져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복용한 빈랑나무 열매와 쥐눈이 콩만도 근이나 포대로 계산하여야 할 정도였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만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추고(推敲)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중략)

“중국사람은 남령초(南靈草)라고 부르고, 동방 사람은 남초(南草)라고 부르며, 민인(閩人-지금의 중국 푸젠성 주변에 살던 야만인)은 연엽(煙葉)이라고 부른다. 또한 박물가들은 연다(煙茶)라고 하기도 하고 연초라고 하기도 하는데 어느것으로 정확한 명칭을 삼아야 할까? 당초에는 이 풀의 설질이 술을 깨게 하고 기분을 안정시킨다고 하여 죽통(竹筒)에 넣고 불을 붙여 연기를 흡입하여 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효험이 있었으나 독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가벼이 시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그 효능을 알아낸 자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간장을 억제하고 비위(脾胃)를 도우며 마비증세를 없애고 습담을 제거하니, 사람에게 유익함은 있어도 실제로 독은 없다고 하였다. 점차 세상에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 한 필과 남초 한 근을 바꾸기도 하며,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재배하고 사람마다 효험을 보고 있는 데 금지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쓰임에 유용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말하자면 차나 술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 종교에 대한 생각

불교

정조는 즉위하자 곧 원당(願堂)의 건립을 금지하였고, 무당과 탁발승의 도성 내 출입을 엄금하는(정조7년) 등 억불의 성향을 나타냈다. 조선 초기부터 궁궐의 인사들과 일부 승려들이 결탁하여 왕실의 원당을 건립해 왔는데, 이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세금의 삭감이나 부역의 공제 등에 왕실을 이용하여, 억불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일부 승려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즉위 초 정조의 불교 정책은 당시의 불교계로서는 간담이 서늘한 조치들이었다. 그런데 정조 9년(1785)이 되면 특명을 내려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의 절반을 감면해 준다. 의승방번전이란 전국에 있는 승려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방위를 위해 순번제로 집결해야 하는 불편함 대신, 양 산성에 상주하는 의승군을 두고 방번전을 납부하는 제도이다. 제도 자체는 지방 승려들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이었지만 그 운용과정에서 여러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즉, 방번전의 액수가 너무 많다거나, 방번전을 납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등 폐해가 많았다. 방번전의 반을 감해주어서 불교계의 숨통이 다소 트인 계기가 되었지만 정조로서는 국정 합리화를 꾀한 것이지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다가 정조 12년(1788)이 되면 남도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서산대사의 사당을 해남의 대둔사에 세우게 하고는 ‘표충사(表忠祠)’ 라는 편액을 직접 써 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듬해 사도세자의 묘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다시 이듬해에는 묘원 옆에 있던 갈양사 터를 대규모로 중수하여 ‘용주사(龍珠寺)’로 개편한다. 스스로 금지했던 원당의 건립을 즉위한 지 14년이 되던 해에 번복한 셈이다.


- 천주교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정책은 원칙적으로는 금지정책이었지만 철저하게 금지하지는 않았다. 정조 자신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보면서도 그 대응책에 있어서는 탄력적인 운용으로 일관했다.
“양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라고 정학, 즉 유학의 진흥만이 사교인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학이 쇠퇴하게 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들어 있다. 정조의 입장을 예로 들면,

“있어야 할 것이 없어져서 없어야 할 것이 생겨났지만, 없어야 할 것이 없어지면 있어야 할 것은 저절로 생겨난다.”
“有之無之 無之有之 無之無之 有之有之”
이런 자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유학의 진흥으로도 역부족이었던지 정조19년(1795)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활동할 무렵에는 전국의 신도 수가 4천여 명, 정조 말년(1800) 경에는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정조의 서거와 순조의 즉위 후 단행된 신유박해를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주교에 편승해 들어온, 서양의 과학과 기술 등을 눈여겨보고 있던 진보적 성향의 정치 세력과, 이들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낀 보수 정치 세력의 한 판 싸움이 신유박해인 것이다. 그래서 신유박해에는 꼭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보수파의 눈 밖에 난 정치인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 애민과 정치력

정조는 백성에 대하여, 마치 부모가 자식 걱정하듯이 ‘늘 다칠까 걱정하듯 살폈다(視之如傷)’ 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에서 입선된 사람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였는데, 그 술잔 복판에 ‘아유가빈(我有嘉賓)-나의 진실로 아름다운 손님’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유생들은 아름다운 시를 써서 왕의 은혜를 노래하였고, 왕은 그들의 명시를 모아 책을 엮고 <태학은배시집太學銀杯詩集>이라고 한다. 임금과 신하가 아름답게 만나는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조는 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감동할 정도로 기뻐하였으며, 뜰에다가 측우기를 놓아두고 우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자주 물었으며, 비가 흡족하게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는 사람이었다.

한 해에는 각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재앙이 극심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정조는 특히 탐라(제주) 백성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배에다가 곡식을 싣고 가서 잘 먹이게 한다. 왕은 탐라가 먼바다 가운데 있는 땅이라 하여 흉년 소식만 들으면 언제나 다른 지방보다 우선해서 진휼하였고, 그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제문을 친히 지어 해신에게 제사하도록 했다.

정조는 정치의 보조 수단으로 형(刑)도 없을 수 없다 하여, 왕위를 이어받은 초기에 형법을 일정하게 정하고 실행하여 인정으로나 법으로나 타당하게 하였다. 사형죄를 다스릴 때는 반드시 세 번의 복심으로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고, 너무 춥거나 더울 때는 가벼운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고 감옥을 깨끗이 청소하여 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옥사 처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선입견도 내세워서는 안된다. 나는 언제나 살릴 수 있는 자를 살리려고 하지 꼭 죽어야 할 자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법 집행의 잣대를 분명히 하면서도,
“내가 옥안(獄案)에 관련되어 있는 자의 성명은 잊어버리질 않는데, 그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의로 하여 그리 된 것이다.”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일이니, 초둔(草芚)이라도 쳐서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숨도 좀 돌리고 기운도 가라앉혀 가면서 그들 속이 시원하도록 할 말을 하게 하라.”
고 해서 따뜻한 인간성을 보인다.


정조는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이라고 했다.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태극은 바로 나이다.’ 라고 백성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내었는가 하면,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
고 하여 백성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군주이기도 했다.

조회를 볼 때마다 날이 밝기 전에 의관을 갖추고 기다렸다가, 신하들이 제각기 맡은 바를 들고 나와 일을 아뢰면 그 모두를 자신이 직접 결재하느라 날이 저물 때도 많았다. 그리고 혹시 시급을 요하는 민사라도 있을 때면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곧바로 아뢰게 했다.
경신년(1800) 6월 병석에서도 ‘백성과 관계되는 일이면 즉시 알리라’ 고 하였는데 그만 그 달을 다 못 채우고 6월 28일 승하하고 말았다.
정조는 정치의 기본을, ‘열은 또 하나의 열로써 다스리고(以熱治熱)’ 동시에, ‘한쪽의 그릇됨은 다른 쪽의 그릇됨으로, 한쪽의 올바름은 다른 쪽의 올바름으로 대비시켜 다스림으로써, 옳고 그름이나 충신과 역적을 대비시켜 처리할 때 나타나는 큰 희생을 줄이겠다(兩是兩非論).’에 두었다.


언론에 있어서는 언로를 활짝 열어두고 모두를 받아들여 되도록 정책에 반영하였다. 비록 대놓고 임금의 잘못을 말하고 전혀 숨김없이 막 대드는 자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포용하였기에 일찍이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라곤 전혀 없었다.
“까마귀나 솔개의 새알을 깨트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의 직무에 대하여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충언을 유도했고,
“지난달에는 혜성이 나타나더니 오늘 새벽에는 또 지진 소리가 들리니, 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분발 노력하여 수성(修省)의 도를 다할 때가 아니겠는가.
 
아! 백 천 가지 병폐는 다 언로가 막혀 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간혹 마련해봐도 입 바른 말을 들을 수가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풍조만 일고 있으니, 이는 구언이 오히려 말을 않은 것보다 더 심한 피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시정(時政)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더 널리 구해 말을 올리도록 하라.”
고 하여 하늘에 대한 경외심과 언론의 중요성, 그리고 진정한 충언을 기다리는 지도자 상을 보여준다.


- 화성성역에서 드러난 애민정신

성역을 시작하고 처음 맞이한 여름의 무더위는 극심했다. 가뭄까지 겹쳐서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무더위와 가뭄에 성을 쌓느라 고생하는 현장에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보낸다. 임금의 마음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정표였고, 그래도 무더위가 가셔지지 않자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역을 중지시키기까지 한다.

“성역이 본디 급하지 않은 일이 아니지만, 그로 말미암아 많은 백성을 근로하게 하고 수고롭게 하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요즈음의 계속되는 건조한 날씨를 꼭 백성을 너무 부려먹은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옛 사람이 오행설과 관련시켜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많은 백성을 부려서 성읍의 역사를 일으키면 양기가 성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 가뭄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백성의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조절하지 못하여 가뭄을 초래하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목수나 석수장이들과 같은 인부들이 들어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비바람을 가릴 처소가 있거든, 그 원하는 바에 따라 성역을 잠시 정지하여 비가 오든지 날씨가 서늘해지기를 기다리게 한다면, 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상쾌하겠는가? 이것이 곧 내 마음도 상쾌하게 되는 것이니, 나의 이 뜻을 골고루 자세히 알리되, 형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하고 그 연유를 보고하도록 하라.”-정조18년(1794) 7월 11일

다음 날엔 삼각산과 목멱산,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또,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백성을 괴롭히는 처사가 있다고 한다면, 설령 공역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니다.”
라고 했던 사람이 성역이 마무리 될 때쯤에는 단호한 의지를 보인다. 인정은 인정이고 업무는 업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듣자하니 성가퀴(女堞)의 용마루에 사용할 벽돌이 아직 구워지지 못한 것이 많아서 내달 20일 후에야 비로소 벽돌 굽는 것을 마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내달 10일 후에 공사를 마칠 수 있다고 했던 말은 경들이 기만(欺瞞)했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은 해괴한 일이 있겠는가? 담쌓는 공사는 비록 끝났을지라도 용마루 덮는 공사를 아직 마치지 못하였다면 어찌 완성했다고 아뢸 수 있겠는가? 벽돌을 굽는 것이 그처럼 제 날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처음에 어찌 깨달아 살피지 못했으며, 내달 열흘 무렵 공사가 끝난다는 것은 서울이나 지방에서 모두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곧 무슨 말로써 핑계삼아 기한을 넘기려 하는가?

내월 초 9일까지 일제히 공사를 마치고 문서를 정리하여 곧이어 초10일에 복명하도록 하되, 이제 이에 정한 기한은 군법에서 정한 기한과 같은 것임을 알라. 경들이 종전에 비록 여러 가지로 보상해주지 못한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잘못된 곳이 있다면 지난날의 공적을 다 가리게 될 것이다.

이 전령을 공경히 받은 후 위에서 정한 기일에 완성되었음을 아뢰는 복명을 할 것인지 여부를 분명히 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병진년(1796) 8월 29일
공사 기간의 연장을 건의했다가 찬바람이 이는 듯한 꾸중을 호되게 들은 조심태는 결국 제 날짜에 성역을 완성한다.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매서운 정조의 의지는 사실 엄정한 국정 운영의 한 단면이었다.

화성 성역을 계획할 때인 정조 17년(1793) 12월 초8일,
“성루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했으나 막상 완공 후에는,
“다만 초루와 돈대 등이 왕왕 기교를 부렸는데 이것이 내가 생각하던 바와 크게 다른 것이다.”
라고 하여 임금과 실무자 사이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연구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조정에 인재가 많았음을 알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라고 하여 능력 있는 신하들을 독려하고 그들에게 성취동기를 심어주려 노력한 흔적도 있다.

“만석거를 만들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누차에 걸쳐 권유 신칙하고 내탕전 수만 금을 내려서 결심하고 시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성들이 도리어 주위가 광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니,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함께 즐길 수도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다.”
고 해서 화성 경영에 자신감을 표하는 한편 백성들의 우매함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성역을 완공한 이듬해의 방문길에는,

“성첩이 모두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자가 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는 것-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이 여덟 글자이다.”
라고 하여 새 수원 화성의 이념을 확실히 밝혔다.
화성 성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는 11차례에 걸쳐 음식을 내리는 호궤(犒饋)를 베푼다. 게다가 달력, 고기나 생선, 모자나 무명, 쌀 등을 자주 하사하여 사기를 진작 시키고 성역이 마무리 된 다음에는 낙성잔치를 열도록 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 뚜렷한 정체성과 주체의식

정조는 자기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실히 한 군주였다. 그러나 당시 서학과 북학이 지닌 경세학으로서의 역할과 학문으로서의 깊이를 인정하고 개혁 정치에 부분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거중기와 각종 기계 기구, 벽돌 등을 사용하게 하고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스스로 안경을 착용하여 정체성의 고루함에 빠지지는 않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릇 같은 생활용품까지 중국산만을 쓰려는 것은 사치풍조가 학문에도 번진 탓.”
이라고 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박한 풍조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실력을 갖추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자기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학문을 재확립해야 하는데, 이는 곧 원시 유학과 주자성리학의 진흥을 의미한다.

정조는 공자 이후 학문을 집대성한 사람은 오직 주자뿐이라고 하면서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주자가 남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전심으로 외우고 본받고 하였는데, 글자 한 자 말 한마디도 전부 모아 편집하여 책상에다 두고 수시로 보았다.
새로운 학문이나 풍조를 받아들이되, 그 기반은 철저히 전통 유학과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며, 이 확고한 기준이야말로 정조가 꿈꾸던 세계화일진대, 이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신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바름으로 평가된 임금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는 효성을 바탕에 깔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합리적인 국정을 도모하였다.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신의 뜻을 펼치는 단호한 의지 확고한 이념은, 후세 사가들이 지(知) 인(仁) 용(勇)을 겸비한 군주라고 평가하는데 한 몫을 한다. 자신을 늘 반성하여 단속하며 솔선수범하는 자세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어서 지천명의 문턱에서 세상을 버린다. 아울러 그가 진두지휘하며 이끌어나가던 개혁정치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가을에 화성행궁 후원의 미로한정(未老閒亭)에서 국화를 감상하는 것이 큰 멋이었고, 화성의 가을팔경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정조는 그 국화를 그렸음직한 국화도와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파초도, 수많은 글씨, 문집 100여 책을 남기고, 아버지 사도세자 묘원의 동남쪽 언덕에 묻혔다. 죽어서도 아버지 무덤을 지키며 효도하겠다는 의지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20여 년 후 효의왕후 김씨가 돌아갔을 때 지금의 자리로 옮긴다.

“능호(陵號)를 건(健)이라 했는데, 이는 쉬지 않고 가고 있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 그 얼마나 걸맞는 이름인가. 복희, 신농에서부터 문왕, 무왕까지는 그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일에 나타나 있고, 공자, 맹자로부터 정자, 주자까지는 그 빛나는 공훈이 그들이 한 말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그대로 본받아 그 여택이 만세를 이롭게 하는 데는 말과 일이 원래 같은 것으로서 서로 입장을 바꾸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왕의 신하였던 사람들이 정해준 능호에 대한 설명이다.
묘호(廟號)에 대한 설명은 또 이렇다.

“묘호는 정종(正宗)이라고 했는데 왜 왕이 ‘바름(正)’이냐 하면, 광대(廣大)를 다하고 정치(精微)를 다하고, 최고로 고명(高明)하고 중용(中庸)의 이치를 통달한 것은 도학(道學)의 바름이었고, 천지 사이에다 내놓아도 위패될 것이 없고 백세 후에 성인이 다시 보아도 의혹될 것이 없었던 것은 의리(義理)의 바름이며,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한 것은 나라 다스리는 법도와 교훈의 바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인(大人)이란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상대가 바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왕의 일생은 ‘바름’, 이 한마디로 모아진다.


*참고도서 : 화성성역의궤,원행을묘정리의궤,조선왕조실록,일득록,홍재전서,꿈의문화유산 화성             -유봉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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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9/02 [16:01]  최종편집: ⓒ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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