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연대, 햇살, 평화나비 제주4.3 동행,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걷다
[보고]정의기억연대, 햇살사회복지회, 평화나비의 제주 4.3 동행
정의기억연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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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5월 5~6일 연휴기간, 정의기억연대, 평화나비, 햇살사회복지회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에서 진행하는 평화기행을 떠났습니다. 제주4·3 유적지 방문을 통해 국가폭력에 의한 비극인 4·3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라는 연장선상에서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제주다크투어가 1박 2일의 일정을 알차게 구성해주었습니다.

첫날 제주공항에서 집결, 동백꽃 배지와 책자를 받고 제주4·3평화공원으로 향했습니다. 2008년 조성된 제주4·3평화공원은 지난 50여 년간 제대로 추모조차 되지 못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희생자 명예 회복, 평화 인권 교육을 하기 위한 장입니다. 단지 4·3 사건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제주 민중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새 나라를 건설하려 애썼고 한반도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  시대의 비극 앞에 스러져 간 사람들 앞에 묵념을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정의기억연대


시대의 비극 앞에 스러져 간 사람들 앞에 묵념을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원혼들이 많은데 화해와 상생을 말하는 것은 나중 일이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으로 이동해 생존자인 고완순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9살 소녀의 눈으로 본 북촌 대학살 증언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제주 4.3의 아픔을 생생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북촌마을은 조천읍 동쪽 끝 해변마을로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가장 활성화 되었던 곳입니다. 1947년 2월 미군정청의 자료에 의하면 북촌지역은 해방 후 전국의 초등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이 35.7%로 1~20%에 그친 타 지역에 비해 전국에서 가장 학력수준이 높았던 곳입니다.

1948년 12월 16일 마을을 지키며 토벌대에 협조하던 민보단원 24명이 구좌읍 동복리 ‘낸시빌레’에서 군인들에게 집단총살 당하는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촌마을 어른들은 군인의 시신을 돌려주려고 군부대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시신을 메고 온 어른들을 총살시키고 집들을 불지른 뒤 북촌초등학교 주변과 밭에 주민 3백여 명을 집결시켜 보복 집단학살을 자행합니다. 북촌마을은 한날 한때 최대의 사람들이 희생된 4·3 사건 최대의 피해마을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을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을 조성하고,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기념비’를 세웠습니다.

▲  우리는 애기무덤 옴팡밭을 지나 북촌마을 안길을 따라 서우봉 진지동굴로 향했습니다.    © 정의기억연대

 

우리는 애기무덤 옴팡밭을 지나 북촌마을 안길을 따라 서우봉 진지동굴로 향했습니다. 서우봉 해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20여 개의 진지동굴이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연합군 함대를 향해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진지동굴을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진지동굴을 보기 위해 좁은 산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서 원치 않는 전쟁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슬픈 운명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숙소는 제주생태관광 고제량대표님이 북촌에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이을락(樂)’에서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둘째날은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되었던 큰넓궤를 방문했습니다. 동광리 큰넓궤는 1948년 11월 중순에 마을이 초토화 된 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으로 120여 명이 숨어 살았습니다.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1949년 초 발각이 됐으나 주민들은 고춧가루 등에 불을 붙여 밖으로 매운 연기를 피워 군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토벌대는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총만 난사했고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한 후 철수했습니다. 밤이 되자 근처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나타나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밖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래서 굴 안에서 사망한 이는 없었으나 결국 이후 토벌대에 의해 잡혀 이들 중 40여 명이 정방폭포 부근에서 학살됐다고 합니다. 큰넓궤로 들어가는 입구는 매우 좁아서 일정 정도 구간은 거의 기어서 들어가야 했고 그런 후에야 큰 공간이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참가자들은 동굴 안에서 이 안에서 무서움에 피해 살았을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습니다.

4·3 당시 총상을 입은 채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 삶터를 방문했습니다. 진아영 할머니는 고향인 한경면 판포리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턱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턱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녀서 ‘무명천 할머니’라고도 불립니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간직한 채 말할 수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이 홀로 남겨져야했던 할머니의 삶은 일제, 해방정국, 4·3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004년 9월 8일 영원한 영면에 드신 할머니의 삶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할머니의 생활유품들도 보고 영상도 시청했습니다.

▲   제주4·3평화공원은 지난 50여 년간 제대로 추모조차 되지 못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희생자 명예 회복, 평화 인권 교육을 하기 위한 장입니다  © 정의기억연대

 

마지막 일정으로 도청 앞에 있는 제주 제2공항반대 천막촌을 방문했습니다. 2016년 강정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된 이후 제주바다에 미핵항공모함이 드나들고 있고, 최근에는 비자림을 밀어 도로를 확충하는 등 제주도가 차근차근 군사기지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섬 제주가 동북아의 화약고가 되지 않기 위해 제2공항 건설시도는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집에도 거의 가지 못하고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분들게 참가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걷어 마음을 전달하였습니다.  

저희를 공항으로 데려다주신 버스 기사님께서 자신도 이 기행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우셨다고, 군사기지가 아닌 아름다운 제주를 후대들에게 돌려주자고 말씀해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이번 기행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정의 실현만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가해자가 강요하는 ‘화해와 상생’이 아니라 앞서의 과정이 실현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피해자가 화해를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4.3 사건이 정명을 찾고 피해자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도록 정의기억연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존자인 고완순 선생님의 증언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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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5. 북촌마을 고완순

1939년생으로 4.3 당시 9살이었다. 지금 미국을 다녀온 지 며칠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피해를 증언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나는 47년 10월부터 북촌초등학교에서 미군을 봤다. 외삼촌이 해방 후 제주중 수학선생으로 교편을 잡을 때 미군 통역도 했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다. 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조종, 방관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해방 후 3년 동안 미군이 진주해있었고 문서상으로 민간인과 활동한 근거가 있다.

여러분들이 다녀 온 진지동굴은 일제가 비행기를 숨겨두려고 만든 곳이다. 예전에 공출 바치고 너무 힘들었다. 왜놈들이 다 빼앗아가서 제주사람이 일본으로도 많이 갔다. 조천읍 북촌리에 훌륭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외삼촌이 일본 동경대 수학과에서 공부하고 해방 후 돌아와 중학교 교편을 잡았는데, 해방 후에도 계속 친일파가 등용되는 현실을 보고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촌은 말썽피우는 동네로 찍혀 있었다.

젊은 사람이나 남자들을 모두 잡아가는 통에 그걸 피해 도피를 하는데 산으로 도망을 많이 갔다. 하루는 순경 그 다음 날은 군인이 왔다. 차가 오는 지 보초를 섰다. 깃발을 눕히면 방공호나 집으로 숨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군인은 노랑 개, 순경은 검은 개로 불렀다. 47년에 언니들을 잡아갔는데 소식이 없어 시신을 찾으러 다녔다. 함덕 2연대 부대 서북청년단이 대창으로 찔러 물에 빠뜨려 죽였고 썰물에 시신 2구를 찾았다. 흉년은 4.3의 전초전, 잘 봐달라고 주민이 경찰에 밥을 대접하면 무장대가 찾아와 괴롭혔다. 1948년 12월 16일 낸시빌레에서 24명이 총살됐다.

군대가 함덕 세화라는 곳에 가고 오는 길에 무장대가 총 쏴서 2명이 희생됐다. 시신을 지고 간 분들 9명 중에 1명의 아들은 남양지서에 순경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 분을 빼고 나머지 8명을 사살했다. 군인들이 마을을 불을 지르고 북촌초등학교에 사람들을 모았다. 나는 군인 옆에 있다가 어깻죽지를 맞았다. 군인들이 운동장을 향해 기관총 2대를 콩 볶듯 쏘았다. 사람들의 머리가 없어지

삼석 김, [10.05.19 15:29]
며 쓰러졌다. 엄마가 대가리를 땅에 박으라고 소리쳤다. 도망치다가 고무신 신은 발에 걸렸는데 아이를 든 엄마의 시신이었고 손에 묻은 흥건한 피를 보고 너무나 놀라 ‘어멍 집에 가자’ 고 외쳤다. ‘엄마나 우리는 오늘 다 죽었다’ 생각했다. 엄마 등에 업힌 동생의 머리에 둔탁한 소리가 났고 동생 얼굴은 부어서 보기가 처참한 지경이었다.

아수라장 속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면 총소리가 수차례 났고, 따라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옴팡밭이 피로 덮혀 검은 흙이 햇빛에 반사됐다. 외가에서 떨어져 자라며 엄마를 자주 못 본 나는 엄마를 다시 또 못 보게 될까봐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마침내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진 듯했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일어서지 못했다. 초가집을 불태운 화염으로 하늘이 벌겋게 변했고, 뜨거워 견딜 수 없는 소 돼지의 울음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다른 집 살림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한림읍에서 청년단장을 했는데 계엄령으로 오갈 수 없었다. 제주는 화산 때문에 논이 없고 쌀도 없다. 그래서 가마니가 없어 시신을 덮을 수도 없었다. 짐승이 눈을 빼먹을까 무서워 억새를 엮어서 이불을 뜯어 시신을 우선 덮었다.

내일 함덕으로 가면 다 죽을 거니 불탄 돼지를 잡고 숨겨뒀던 제사용 쌀을 장만해 최후의 만찬을 먹었다. 피난을 떠나 목숨은 살게 됐지만 배고파서 밥 도둑질을 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 결국 동생은 머리에 물을 빼는 등 고생고생하다가 51년 3월에 죽었다. 나물 뜯은 돈으로 제주여중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엄마 돈 2천원을 훔쳐 강원도 속초로 도망가서 살았다. 남편이 죽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 지 15년째다. 사람들이 너무나 고생을 해서 그런지 북촌은 배타적인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동네에서 4.3 북촌리 유족회장도 하고 있고 8년째 노인회장을 맡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근 고완순의 전성시대 라는 책도 출간했다.

그때의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집을 불 지르고 노약자 여성을 무조건 학살했다. 빨갱이 마을이라고 보복한 것이다. 이전에는 연좌제에 다들 걸렸다. 이런 얘기를 자유롭게 말한 게 10년이나 됐나. 안기부에 끌려가는 공포에 떨었고, 사상도 모르는 우리는 71년간 너무 억울하게 살았다. 자국민을 보호하는 게 군인인데 자국민을 학살하는 게 말이 되는가. 당시 11살이었던 사람이 트라우마로 기억을 모두 잊고 고향에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가족들이 죽은 장소를 찾아내 제를 지내겠다고 했고 문중 밭에 산소비를 세웠다. 오랜 세월의 트라우마는 엄청나다. 살아있는 분들의 회고록 필요. 모든 집이 한날 제사를 지낸다. 가족 20명이 한 번에 몰살된 집도 있다. 특별법 보상금 등 본격적 논의가 되면 싸움이 날 수도 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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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0 [16:41]  최종편집: ⓒ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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